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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by 달지니 2024. 5. 22.

지그문트 프로이트(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 185656~1939923)는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환자와 정신분석가의 대화를 통해 정신적 병을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하기도 했습니다. 인간 생활에서의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성욕을 새로이 정의했고, 초기 뇌성마비를 연구하기도 했으며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기법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잘 알려져 있듯이 '무의식' 연구의 선구자로서 무의식이란 개념을 대중화하였는데요. 그는 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정신이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와 함께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개념도 제시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생리학자인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며, 장 마르탱 샤르코, 요제프 브로이어,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유명한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이 버려지거나 수정되었지만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과 주장은 인문 과학뿐 아니라 일부 사회 과학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185656일에 태어났는데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메렌의 작은 도시인 프라이베르크인메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는 양모를 파는 유대계 사업가였으며 세 번째 결혼한 아말리아와의 사이에서 지그문트가 탄생하였습니다. 지그문트에게는 모두 6명의 형제가 있었고 그의 이복 형은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할 정도였습니다. 지그문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지그문트가 4살일 때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주했습니다. 프로이트가 거의 평생을 거주했던 빈에도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의 유대인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현지인과 잘 융화되었는데요. 당시 그곳의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 중 절반 가량이 유대인이을 정도입니다. 그는 김나지움 7학년 내내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문학을 좋아했고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언어 분야에 능통했습니다.

TMI긴 하지만 후에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에 대해 고백하기를, 자신이 두 살이 좀 넘었을 때 어머니의 몸을 보고 강하게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또한 여자 조카를 성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퉜던 남동생이 죽었을 때는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편애 수준의 사랑을 받고 성장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자기보다 아들에게 더 정신이 팔려 있다고 그의 어머니에게 화를 내기도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법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자연에 영향을 받아 빈 대학교 의과 대학에 입학해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또한 생리학자였던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에게서는 신경해부학을 배웠습니다. 졸업 후에는 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했고, 이때 코카인의 마취작용을 연구하여 우울증 치료제로 활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뱀장어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는데요. 뱀장어의 생애 주기가 밝혀지지 않았던 때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동물학 연구소에서 4주간 머무르며 수컷 뱀장어의 생식 기관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뱀장어 수백 마리를 해부하기까지 한 노력에도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였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1876년에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보고서에 실린 그의 첫 논문 "뱀장어의 정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바꿉니다.

빈 대학교 의과 대학에 다니던 프로이트는 1학년일 당시 브뤼케를 주임 교수로 만나게 됩니다. 브뤼케는 1874년 그의 저서 '생리학 강의'에서 "정신 역학"의 개념을 제안했는데요. 이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하나의 역학계이고, 이에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받아들였고, 정신,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은 그로부터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존 볼비의 말에 따르면, 화학과 물리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모델은 브뤼케, 요제프 브로이어, 테오도어 마이네르트,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헤르만 폰 헬름홀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1879, 프로이트는 1년 간의 의무 군 복무를 수행하면서 연구를 잠시 쉬었으며, 1881년에 논문 "하급 어류종의 척수에 관하여"(Über das Ruckenmark niederer Fischarten)로 의학 박사(M.D.)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88510월입니다. 프로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를 하기 위한 목적므로 파리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당시 살페트리에르 병원장이었던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했으며, 히스테리 환자를 대상으로 한 최면 기법을 청중 앞에서 자주 시연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런 그의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 간 연구하며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는 나중에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파리에 머물면서 얻게 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는데요, 그는 이 때 신경학 연구가 금전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어 정신병리 치료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1886년 프로이트는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자크 베르나이스의 손녀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하고, 신경과 진료소를 차렸습니다. 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했지만, 치료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후에는 환자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 치료는 환자가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환자의 무의식에 갇힌 강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특정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러한 억압이 정신에 해를 끼치고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40대가 된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했으며, 그밖의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했는데요.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과 기억, 인격 발달의 변이를 탐색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896년에 죽은 아버지 야코프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11월에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동시에 그의 유명한 저서인 꿈의 해석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정신 분석학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만들었습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이 출간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증가했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도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카를 융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프로이트 또한, 융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종교와 신비주의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의 말년은 과연 어땠을까요? 1930,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괴테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면서,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의 책은 상당수가 불태워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19383월에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빈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들끓었습니다. 프로이트가 거주하던 집에 비밀 경찰이 들이닥치고, 빈 정신 분석 학회는 해산하게 되었으며, 프로이트는 책과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죽기 위해" 19386월에 가족들과 함께 빈을 떠나 영국 런던 햄프스티드의 20 메어스필드 가든스(20 Maresfield Gardens, 현재의 프로이트 뮤지엄)로 망명했습니다.

한편 지독한 애연가였던 그는 구강암 때문에 생전 30번이 넘도록 수술을 받았는데요. 19399월에 그는 의사이자 친구인 막스 슈어를 설득해 자신의 자살을 돕도록 했습니다. 그는 결국 미완성 원고인 <정신 분석학 개관>을 남겨두고 1939923일에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 뒤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막내딸인 아나 프로이트는 그의 영향을 받아 아동정신분석학자가 되었습니다.